YUN SUKNAM | 윤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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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 
“지금은 따뜻한 마음, 배려가..",여성신문,2015.6.2
만남 / 윤석남 작가의 삶과 그림 그리고 가족
“지금은 따뜻한 마음, 배려가 필요해요”
언제 시작했느냐는 중요치 않아
하고 싶은 일 하는 것이 중요

‘그림에 내 삶 걸겠다’ 각오로
주부로 일한 월급 미술에 투자



▲ 6월28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윤석남-심장'전을 여는 작가 윤석남씨. 작가의 글과 그림이 함께 담긴 드로잉 160여 점과 신작 '허난설헌', '이매창',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를 지난 작업들과 함께 선보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로 지금,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층 중앙에는 거대한 심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작가 윤석남은 이 분홍빛 심장에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신의 재산을 쌀과 바꿔 죽어가는 제주도민을 살렸다는 거상 김만덕의 이야기는 윤 작가의 손끝에서 따뜻한 심장으로 되살아났다. 김만덕의 심장이자 윤석남의 심장은 이 순간에도 조용히 뛰고 있다.

‘윤석남-심장’전이 모든 시민 앞에 열려 있다. 그냥 심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된다. 6월 28일까지 열리는 전시회는 무료다. 그의 첫 개인전 출품작인 ‘무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표현한 ‘화이트 룸–어머니의 뜰’까지 32년간 어머니와 자연, 여성사, 문학으로 엮인 작품들이 총망라됐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이자 대모로 불리는 그의 나이는 올해로 일흔여섯. 40대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1982년 생애 첫 개인전이 끝나자 남편은 “계속해서 그림 그릴 거야?”라고 물었다. 윤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할 거야.”

-심장은 어떤 의미인가.

“심장은 따뜻한 마음, 넓게 본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심장의 의미가 약해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심장을 잃어버리고 있다. 경제가 삶의 중심에 들어오니까 타인에 대해 생각하기 힘들어졌다. 각박하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된다. 어느 시대든 다 그렇겠지만, 특히 더 힘든 게 요즘인 것 같다. 점점 더 심장이 약화하고 있다. 심장이 움직여 피가 따뜻하게 흘러야 하듯 사회도 좀 더 건전하게 돌아가야 한다.”

-특별히 가슴 아팠던 사건이 있었나.

“너무나 많다.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거둔 이애신 할머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흔히 사랑하던 개를 여러 가지 불편한 이유로 버리지 않는가.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실체가 드러나니 충격적이었다. 예전에 영화를 전공하는 여성이 굶어 죽은 사건도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지경까지 갔을까.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사람들이 너무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거 아니었을까. 아무 관련 없는 나도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사실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 나도 사회의 일원이니까…. 책임 의식을 많이 느낀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표현하게 되는가.

“작가는 굉장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특히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고 시간에 대해서는 더 이기적이 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은 중요한 일이다. 바로 옆에 있는 ‘너’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전체 사회에 대한 관심이다. 사회문제를 작품을 통해 구현하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만덕의 핵심은 죽은 목숨도 살려내는 밥이다. 밥. 김만덕 같은 과거의 이야기를 빌려다 지금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요즘에도 뒤져보면 거창하지 않아도 한 달에 한 번 몇 푼이라도 남을 돕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본인에게 가능한 선에서 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가 발달할수록 너무나 각박하니까.”


▲윤 작가는 '그림에 내 삶을 걸겠다'는 각오로 그렸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40세에 시작한 늦깎이 화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어떤 때는 좀 뭐한 게, 작품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자존심이 좀 상할 때도 있다. 어제는 48세에 그림을 시작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독특하게 호주 멜버른에서 미술대학을 나왔다. 아주 늦게 시작한 거다. 그런 사람도 있다.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이슈가 되는 걸까. 자기가 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하는 거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하는 거 아닌가.”

-한 달치 생활비를 화구 사는 데 쓴 일도 있다고 들었다.

“남편이 준 월급을 가지고 후배랑 같이 당시 가든타워라는 호텔에 갔다. 12층인가 올라가면 화구만 팔았다. 처음 가봤는데 돈도 있겠다 다 써버렸다. 그러고 나서 한 달을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굶진 않았을 거다.(웃음)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나도 궁금하다.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월급으로 몽땅 화구를 샀다는 것만 정확히 기억난다.”

-그림을 시작할 때 남편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엔 서예를 4년 했다. 근데 이건 내 길이 아닌 거 같아 남편에게 ‘난 그림을 그려야겠어’ 했다. 남편은 ‘그럼 그림을 그려야지. 당신이 하고 싶은 일 해야지’ 그러더라. 말리거나 잔소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릴 권리는 또 어디 있나. 내가 하는 건데. 가정 살림은 오전 11시면 끝난다. 그 이후의 삶도 꼭 시간을 맞춰 뭔가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난 아무런 의식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하도 남편이 싫어하진 않았느냐고 하니까 나중엔 ‘내가 덕을 좀 봤나?’ 싶었다. 남편에게 고마운 건 ‘당신 삶이니까 열심히 사는 거, 그게 보기 좋은 거 아닌가’ 하고 알아줄 때다.”

-그 당시 그림은 어떤 의미였나.

“처음부터 취미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삶을 걸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나 취미로 해’ 그런 말 절대 안 했다. 전력을 다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고,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돈은 남편에게 받아서 썼다. 언젠가 ‘남편한테 기생하니까 나는 작가가 아니고 기생충인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가정주부도 내 직업이고, 화가도 내 직업인 거다. 가정주부로서 받은 월급을 그림 그리는 데 쓰겠다고 생각했다. 가정주부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시어머니도 모시고 살았고, 남은 생활비 아껴서 땅도 조금씩 샀다. 지금 사용하는 작업실도 30대 초반에 사놓은 땅이다. 큰 소리 칠만 하지 않나.”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셨나.

“남편은 2살 많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학교 다닐 때는 서로 몰랐다. 남편이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직장생활 하던 22살 시절 소개로 만나 6년이나 연애했다. 신혼집은 아직도 기억난다. 보증금 1만3000원에 월 1300원짜리 부엌도 없는 단칸방. 나중에 방 두 개짜리 집으로 가니까 살 것 같았다. 다니던 직장은 결혼과 동시에 ‘탈퇴’했다. 그땐 결혼하면 살림이었다. 그땐 모두 그랬으니까 ‘할 수 없다’ 생각했다. 딸은 8년 후에 낳았다. 아기는 갖고 싶었지만 안 생기더라. 그때만 해도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원인도 몰랐다. 그림을 시작할 때 딸이 5살 정도였다. 그림 때문에 아이한테 신경을 많이 못 써줬다. 중학교 이후에는 미술을 싫어하더라. 그럴 수밖에. 지금은 제일 친한 친구지만, 엄마 작업에 큰 관심은 없다. 우리 가족은 쿨하다. 남편하고 딸은 전시회에 딱 한 번 다녀갔다.”


▲ 윤 작가는 40세에 미술을 시작한 뒤 가장 먼저 '어머니'를 화폭에 담았다. 작가의 어머니는 38세에 남편과 사별한 뒤 6명의 자식을 혼자 힘으로 키워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009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예전에는 ‘엄마’ 얘기만 나오면 울었다. 복받쳤다. 지금은 다 닳아서 없어졌나 보다. 어머니는 엄하고 얌전한 분이었다. 잔소리도 안 하고 살림만 하시는 깨끗한 분이셨다. 엄마가 서른아홉 되시던 해에 애가 6명이고, 막내가 2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의 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긴 게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문인들이 돈을 좀 걷어줬던 것 같다. 어머니가 그 돈으로 전세를 알아봤더니 방 두 개짜리 초가집 하나 빌릴 수 있겠더란다. 자식 6명을 데리고 남의집살이는 못 하겠다 싶어 수소문 끝에 금호동으로 가게 됐다. 당시에 청계천 피난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고 15평인가 20평씩 줘서 금호동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어머니가 조카 한 명을 데리고 그곳에 방 두 개, 마루 하나, 부엌 있는 집을 지은 거다. 그런 머리가 있는 분이셨다. 가난했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딱 한마디 하셨다.”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기자였던 아버지 윤백남씨에 대한 기억은.

“중학교 때였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학교는 좋았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잘하는 건 잘하고 못하는 건 못하는 아이였다. 그때 아버지가 성적표를 보시더니 ‘석남아, 낙제만 안 하면 돼.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돼’ 하셨다. 중학교 때도 학비를 내던 시절이었으니 낙제하면 돈이 들지 않나.(웃음) 아버지는 신발이 두 개인 적이 없었다. 하나가 생기면 하나는 후배에게 주셨다. 또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 갔다가 다시 서울로 환도했을 때 피란민들이 집을 점령하고 있더란다. 나가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던 분이다. 26살 아래인 당신 부인에게는 꼭 존댓말을 하셨다. 항상 존댓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26살 차이가 나신다.

“아버지는 유명한 소설가였고, 어머니는 신문에 연재되는 아버지 글의 팬이었다. 그 작가가 어느 날 자기 집으로 하숙을 들어온 거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됐겠나.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하숙을 왔는데. 아버지가 하숙집 딸을 꼬여서 도망을 갔다. 45살 유부남이 19살짜리 처녀를 데리고 도망간 게 우리 어머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했다. 솔직히 싫어했다. 그건 잘못한 일이고, 아버지니까 용서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작은아버지가 유명한 전기공업자였고, 한국전력 전신인 조선전업 고문이었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자기 형의 첫째 부인이 아니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어려운데도 10원 한 장 손 안 벌리고 자신이 다 감당했다. 두 번째 부인, 평생 그게 당신의 응어리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굉장히 사랑하셨던 것 같다.

“사랑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다시 태어나도 니들 아버지하고 결혼할 거다’ 그러셨다. 내가 아버지를 뭐라고 비난하면 ‘넌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라고만 하셨다. 남편을 정말 존경하고, 오로지 남편만을 위해 사셨다. 95에 돌아가셨는데도 아버지 무덤을 좋은 데다 안 모셨다고 우셨다. 그래서 나중에 두 분을 좋은 곳에 모셨다. 그런 사랑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화가 윤석남은…

▲윤석남 '손이 열이라도'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인 작가 윤석남은 자신의 어머니를 시작으로 모성, 여성성, 생태 등 다양한 주제를 다양한 조형언어로 시각화해 왔다. 1982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행상 등 일하는 서민 여성의 모습을 그린 유화 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3년부터 1년 동안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1985년 김인순, 김진숙 작가와 함께 여성 작가 3인이 ‘시월모임’을 결성해 1985년 10월 9일부터 15일까지 관훈갤러리에서 제1회 시월모임전을 개최했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시원이라 평가되는 시월모임 2회전 ‘반에서 하나로’를 1986년 개최했다. 인문사회계열 여성학자와 여성 문인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문화’ 회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시월모임 회원들과 함께 같은 해 민족미술협의회 내 여성미술분과의 주축이 됐고 여성문제를 탐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특별전에 설치작품 ‘어머니의 이야기’로 참여했으며, 1996년 여성미술가 최초로 이중섭미술가상을 수상했다. 1997년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기사원문보기: http://www.womennews.co.kr/news/83891#.VYIwYfntl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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